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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5 - 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 (1945-1959) 조 종 무* 목차 서문 재미한인의 인구 증가 및 정착 1950년대 한인들의 경제적 적응 1950년대 한인단체 및 기관 서 문 재미한인의 정착사를 논할 때 이제까지 대부분의 자료들이 1902년 12월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102명의 하와이 사탕 수수밭 노동이민을 그 효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뉴욕을 비롯한 미 동부 지역의 한인 정착사는 그보다 13년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인 최초 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이 1890년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펜 실베이니아에서 시민권을 취득했고 두 번째 시민권자인 서광범도 뉴저지 에서 귀화신청을 한 다음 1892년 워싱턴 DC에서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 기 때문이다. 1) 두 사람 모두 1884년 12월 국내에서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 * 현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City University of New York Queens College 부설 재외한인사회 연구소 Research Associate. 1) 방선주, 『미주지역 한인 이민사』, 국사편찬위원회, 2003, 74쪽. ‘서재필은 1890년 6 월19일에 시민이 되었고 서광범은 1892년 11월18일에 얻었다, 서재필은 이름을 Phi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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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 (1945-1959)

조 종 무*

목차

서문

재미한인의 인구 증가 정착

1950년 한인들의 경제 응

1950년 한인단체 기

서 문

재미한인의 정착사를 논할 때 이제까지 부분의 자료들이 1902년 12월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102명의 하와이 사탕

수수밭 노동이민을 그 효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뉴욕을 비롯한 미 동부

지역의 한인 정착사는 그보다 13년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인 최

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이 1890년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펜

실베이니아에서 시민권을 취득했고 두 번째 시민권자인 서 범도 뉴 지

에서 귀화신청을 한 다음 1892년 워싱턴 DC에서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

기 때문이다.1) 두 사람 모두 1884년 12월 국내에서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

* 국사편찬 원회 해외사료 조사 원, City University of New York Queens College

부설 재외한인사회 연구소 Research Associate.

1) 방선주, 『미주지역 한인 이민사』, 국사편찬 원회, 2003, 74쪽. ‘서재필은 1890년 6

월19일에 시민이 되었고 서 범은 1892년 11월18일에 얻었다, 서재필은 이름을 Phi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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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로 일본에 망명했던 인물들로 그들의 2차 망명지인 미국에서 각기 시민

권을 얻은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그보다 좀 더 앞선 미국 내 한인의 족

을 찾는다면 1883년 9월 뉴욕에서 제21 미국 통령을 만났던 고종의

보빙사 단의 방문을 들 수 있겠으나 보빙사의 역할은 한차례 외교 인

방문으로 끝난 것이므로 이민사를 기술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서재필과 서

범의 미국 시민권 취득 시기를 이민의 효시, 는 최 의 정착시기로 보

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보빙사의 미국 방문 때 조선 최 의 국비

장학생 유길 의 더머 아카데미 입학2)을 시 로 한 구한말 유학생들의 미

국유학이 뒤를 잇게 되었고 유학생들이 늘자 1921년 북미한인유학생총회

가 뉴욕에서 발족되어3) 1940년 까지 국조직으로 활동했다. 그와 같은

유학생들의 미국 내 정착을 기반으로 하는 미 동부지역 한인들의 역사

와,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 회4)를 시발로 하는 미국 내 한인들의 독

립운동사는 비교 상세한 술 등에 의해 기록되어 있지만 해방 직후부

터 한인들의 이민물결이 쏟아져 들어온 1970년 까지 약 25년에 걸친 기

간 뉴욕과 뉴 지를 비롯한 미 동부지역의 체계 인 한인역사 기록은 극

히 부실한 상태에 있었다. 데이터도 없었거니와 이에 한 연구 노력도 기

Jaisohn으로 거치고 모든 서류에 고향을 펜실베이니아 주로 고 …’

2) 유동 , 『유길 』, 일조각, 1987 , 103쪽. ‘사 단이 귀국하려던 11월 그는 로웰의

주선으로 매사추세츠주 세일렘시의 피바디 박물 의 장 모스박사에게 인도되어 약

9개월간 입학 비를 한 개인지도를 받고 1884년 9월 바이필드의 담마 아카데미에

입학되었는데 불과 9개월간의 비만으로 입학이 가능하 으니 …’

3) 조종무,『허드슨강에 닻을 내리다』, 한미헤리티지재단, 2010, 222쪽. ‘이때쯤 미주

체를 카버하는 한인 유학생회를 발족시키자는 의견이 개진 다. 이에따라 뉴욕을 비

롯하여 하와이, 샌 란시스코, 가주 로우스, 나성, 크빌, 조지아, 시카고, 보스턴,

워싱턴, 오하이오 등 11개 지역 학생들의 발기로 1921년 4월30일 뉴욕에서 북미주한인

유학생총회가 발족 다.’

4) 홍선표, 『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 , 1997, 131쪽. ‘제1차 한인회의는

1919년 4월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의 리틀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는

하게 비되었고, 특별히 한인들이 은 미동부 지역에서 개최되는 지리 요인 때문

에 많은 한인들이 참석할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성공 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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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 (1945-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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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여진 흔 을 찾기 어렵다.

해방 후 그런 로 조직을 갖춘 체계 인 한인단체라고 할 수있는 뉴욕

한인회가 1960년 6월 창설 고 이어서 62년 최 의 한인식당, 60년 말

주말 한국학교가 발족했고 커뮤니티의 주요 구성요소인 사센터와 병원,

직업학교는 70년 에 출 했다. 1973년 뉴욕에 이민한 필자는 동포언

론의 일원으로서 이민역사에 한 자료의 결핍을 감하게 되었다. 이미

늦었지만 부족한 이민사 자료들을 챙겨놓자는 취지에서 국내로부터 련

서 들을 수집하고 미국도서 등을 찾았다. 노령에 어든 커뮤니티

지도자, 유학생 출신 인사들을 개별 으로 찾아가 구술을 통한 이민사 자

료를 꾸 히 모으기 시작했다. 직 찾아가 챙겨놓지 않으면 사라져가는

해외 개척 사료들을 구해놓자는 의도 다.

해방직후인 1945년부터 1959년에 이르는 시기 뉴욕-뉴 지 한인사회는

한국 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 구심 있는 단체나 기 들이 태동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뮤니티 구성을 한 비단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역사 인 사료와 이민사회의 상을 살펴보기 해 필자는 몇 가

지 참고문헌과 당시 뉴욕에 거주했던 주요 인물들을 직 인터뷰하는 방

식을 택했다. 참고문헌으로 당시 유일했던 뉴욕한인교회의 역사를 비교

상세하게 조명한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와 한때 뉴욕에 소재했던 ‘미국의

소리 방송국’ 아나운서 황재경 회고록, 50년 유엔 사로 재직했던 ‘임병

직 회고록’, 이 규 교수의 ‘재미한국인’, 그리고 한국 문교부가 1986년 발

행한 ‘해외 유학생 실태조사’를 주로 인용했다. 한편 구술 인터뷰에는 해방

유학생 출신으로 기성세 동포가 된 강한모, 김배세, 김형린, 임창 ,

해방 후 유학생 출신으로 재미동포가 되어 50년 를 뉴욕일원에서 살았던

고 림, 김일평, 노용면, 윤종선, 이원순, 이정식, 임길재, 학 외에 유학

생 출신으로 한국에 돌아가 활동하던 백선기, 이동원, 한동일, 김자경, 박

규, 정부기 요원으로 뉴욕에서 50년 에 근무했던 김용식, 유창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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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응해 주었다. 유일하게 하와이 이민 2세로 뉴욕에서 한인 최 의 변호

사 활동을 하던 남병학도 인터뷰의 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구술역사

(Oral History)에 한 체계 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고 인식이 제 로

되어있지 않은 시기 으므로 필자는 주로 인터뷰 녹음을 통한 녹취록을

작성하고 이를 더블 체크하면서 필요에 따라 자료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

연구에서는 주로 2차 세계 이 끝나고부터 미국의 이민개 이 이루어진

1960년 이 까지 뉴욕일원 한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가에

을 두고 인구증가, 새로운 이민패턴, 주거지역, 이들의 경제 응, 그리고

이 시기에 조직되어 활동하던 한인 단체들의 면모를 더듬어 보았다.

재미한인의 인구증가 정착

1. 기성세대 … 해방 전 잔류 그룹

<표 1> 해방 후 한인사회에 기여한 기성세대 인물들

이름 입국 학력 50년 직 한인사회 기여도

남궁염 1907년 랜돌 매컨 뉴욕총 사 독립유공자

이원순 1914년 보성 문학교 부동산 개업 뉴욕한인회장

윤치창 1920년 시카고 기 트사 운 뉴욕한인회 부회장

강용흘 1921년 하버드 리태니카 편집 원 작가,국제펜클럽

김형린 1921년 컬럼비아 식품 제조회사 경 뉴욕한인회장

김배세 1925년 오블린 롱아일랜드 도서 뉴욕한인회실행 원

임창 1933년 린스턴 뉴욕주립 교수 민주화 운동

강한모 1934년 트 주립 스티 슨고교 교사 뉴욕한인회장

김 성 1934년 드루 신학부 뉴욕한인교회 목사 뉴욕한인회사무총장

서상복 1935년 린스턴신학 동진무역 경 뉴욕한인회장

해방과 더불어 조국이 일본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일부 인사들은 비가 갖춰지는 로 귀국길에 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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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 (1945-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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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이러 러한 사정에 따라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한 사람

들도 상당히 많았다. 미국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리면서 지에 정착한 경

우도 있었지만 아직 학 를 마치지 못해 귀국시기를 미룬 유학 들도 많

았다. 는 타의에 의해 귀국길이 막힌 인재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각자의 개인사정에 따라 귀국 와 잔류 로 그 운명이 갈라지게 되었다.

이때 귀국 는 곧이어 탄생한 한민국의 발 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

었고 잔류 는 미국사회에 응하면서 이후 크게 성장한 재미한인사회의

원로그룹으로서 리더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 때 귀국의사가 있었으나 해

방정국의 소용돌이를 망하며 귀국기회를 울질하던 인사들은 해방직

후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정세가 좀처럼 안정되지 못하고 미소양국에 의한

신탁통치,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자연 귀국을 미

루는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북한지역이 고향인 동포들은 어차피 고향땅

에 발을 딛지 못할 바에 미국에 정을 붙이고 살겠다는 심정으로 러앉은

이들이 많았다. 반면 귀국해 활동하고 싶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타의에 의

해 그 길이 막힌 인사들도 있었다. 서재필5), 강용흘6), 안익태7) 등이 그

5) 이정식 녹취록. 해방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 회를 주최하고 독립운동을 펼치

다가 해방 직후 미군정청하지장군의 수석고문으로 일시 귀국한 서재필은 김구, 김규식

과 교류하면서 이승만과는 소원한 계를 유지했다. 이승만의 신탁통치 반 , 남한 단

독정부 수립노력이 결실을 보게 되고 5.30 선거로 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정

종식과 함께 서재필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는 조국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싶었으

나 이승만이 집권한 당시의 한국 내 정치 실이 그의 잔류를 허용치 않았다. 국내체류

만 1년2개월 만에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메디아자택으로 돌아왔다. 1951년 타계.,

6) 조종무, 『아메리카 륙의 한인풍운아들』 상권, 1987, 조선일보사, 233쪽. 하버드

에서 미문학을 공한 강용흘은 뉴욕에서 동양문학의 번역과 문소설 창작에 념

했던 작가 다. 그의 표 인 작품 당(The Grass Roof)은 자 장편소설로 한국

정서를 그려낸 뛰어난 작품이다. 이 소설은 10개 국어로 번역돼 세계 인 작가로

각 을 받으면서 구겐하임상도 수상했다. 1937년 발행된 동양인 서양에 가다(East

goes West)외에 동양의 시(1929), 행복한 숲(The Happy Grove 1933년)등을 술했고

1971년엔 한용운의‘님의 침묵’을 번역했다. 그는 미국생활 50년 부분을 뉴욕에 살

면서 당 의 작가인 펄벅, 토마스 울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해방 후 한국에 잠시

견되어 미 24군단 민간고문으로 활약했으나 이 때 이승만과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미국으로 돌아왔다. 뉴욕 학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승만의 독재를 자주 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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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비롯해 해방 부터 뉴욕일원에 거주하던 재미동포들은 후 입

국한 유학생들과 함께 한인커뮤니티를 구성하는데 추 인 역할을 담당

하게 되었다. <표 1>의 뉴욕의 경우 1960년 4.19 직후 기성원로동포들과

신진유학생그룹이 힘을 합쳐 뉴욕한인회를 창설했다. 1950년 기성세

로 분류된 인사들 가운데 김형린8), 강한모9), 윤치창, 서상복, 김배세10), 김

롱아일랜드 헌 턴에 오래 살았던 그는 말년을 로리다에서 보내다 1972년 12월11일

심장 마비로 타계했다.

7) 최병 ,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1992, 깊은샘, 496쪽. 세계 인 작곡가이자 지휘자

안익태는 1932년 도미하여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는

한편 35년에는 뉴욕 한인교회에 기숙하면서 애국가의 원곡인 ‘코리아 타지’를 작곡했

다. 몇 년 간 착상해왔던 애국가 작곡을 마치고 36년 이를 발표했다. 뉴욕한인교회가

애국가의 원산지가 된 셈이다. 제2차 세계 이 끝나자 스페인 출신 마리아들로

스탈라벨라와 결혼, 스페인 국 을 얻어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국, 이태리, 미국 등의 명한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무 를

노크하면서 고국에 안기기를 희망했으나 국내 음악인들이 그를 질시, 냉 하는 바람에

귀국길이 막혔다. 그는 50년 말, 60년 뉴욕에 들러 동포들의 행사에도 참여한

사진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8) 김형린 녹취록. 김형린은 일제 시 에 유학생으로 입국한 인물로 시카고 학에서 교

육심리학을, 컬럼비아 학원에서 석사학 를 받았다. 해방 보스턴에서 화 장사 경

험을 가졌던 그는 뉴욕에서 안승화가 운 하던 식품 소매 도매회사 Oriental Food

Product(19-23 Commerce St. 소재)를 인계받아 70년 까지 부인 김랑과 함께 운 했

다. 외국상품 수입과 도매도 겸한 사업체 으나 김형린이 수받은 부분은 찹수이를

만드는 식품공장이었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인 그는 60년 뉴욕한인회 창설 주역의 한

사람으로 제3 뉴욕한인회장을 하면서 그가 학창시 미국에서 꿈꾸던 한 학교, 뉴

욕한국어학교를 세워 뉴욕한인교회 등에서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최 의 인물이

되었다.

9) 강한모 녹취록.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강한모는 오하이오 트 에서 생물학을 공,

제2차 세계 때 미육군 특수부 인 OSS에 차출되어 정보 분석 으로 복무한 경력

으로 후 뉴욕에서 고등학교 교편을 잡았다. 뉴욕시 스티 슨고교의 생물학 교사로

15년간 직했다. 랑스계 교사 콘스탠스 나지와 결혼, 미국에 정착한 몇 안되는 국

제결혼 이스 다. 그 역시 한인 커뮤니티의 결속을 가장 열정 으로 주창한 인물로

1960년 뉴욕한인회 창설 당시 주역으로서 제2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했다.

10) �뉴욕 한국일보�, 2011년 11월 17일자. 1950년 와 60년 뉴욕 한인사회에서 여성 사자로 활동했던 김배세(베씨김)는 한국 기간 한미재단에 근무하면서 미 역으로부터 답지한 구호품을 선편으로 한국에 보내는 작업을 담당했다. 구호품을 보내온 각처의 사단체나 개인들에게 감사편지를 일일이 타이 로 쳐서 보내는 일도 했다. 1960년 뉴욕한인회가 창설될 때 실행 원으로 극 참여한 김배세는 해방이후 처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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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 (1945-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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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11), 김매리, 송 구, 홍윤식, 김계 , 정애경, 화 , 이병두 등은 커뮤

니티에 극 참여한 인물들이었다. 강한모와 김형린은 고향이 북한지역이

라는 에서 공통 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둘 다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정착했다는 안정감이 귀국을 꺼리게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

다. 뉴욕일원에는 이북출신 동포들이 제법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특히 함

경도민회라는 친목조직이 60년 이후 90년 까지 활발하게 움직 던 것

을 알 수 있다. 강한모와 김형린에게 있어서 한 가지 공통 은 1960년

창설된 뉴욕한인회의 결성작업에 열성 으로 참여했다는 이다. 이들은

60년 4월과 5월에 소집된 뉴욕한인회 재건 비 원회 멤버로서 주역을

담당했으며 이들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기의 뉴욕한인회가 운 다고

볼수 있다. 한인회 창설시 소장 유학생들의 지지에 따라 서상복이

회장에 선출 으나 임기 1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6개월 만에 도하차하

는 모습을 보 으며 그 후임으로 강한모가 당선되었고 그 후임으로 김

형린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을 보면 해방 기성세 의 입김이 당시 얼마

나 강했던 것인지를 가늠해 볼수 있다. 이상 거론된 세 인물, 강한모, 김형

린, 김 성 등은 미국 내에서 한인들이 정착을 통해 미국정치 참여와 주류

사회 진출 의지를 일 부터 가졌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뉴욕한인회를

기에 이끌었던 리더이면서 미국정치와 사회참여를 해 실질 인 노력을

로 만나게 된 뉴욕 동포들의 합동야유회의 비 원장을 맡아 재정이 없던 한인회 야유회를 치루기 해 한미재단 근무 당시 련을 맺었던 미국단체 등을 찾아가 후원을 받아낸 흔 이 있다. 를 들자면 코카콜라 회사를 찾아가 24병 들이 콜라 13상자를 찬 받았고 라이어 아이스크림 회사와 교섭을 벌여 아이스크림 100통을 기부받았

다는 기록이다. 그는 이후 롱아일랜드 루클린 캠퍼스 도서 사서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11) 조종무,『아메리카 륙의 한인풍운아들』상권, 조선일보사, 1987, 361쪽. ‘이 시기

한사람의 커뮤니티 인물로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김 성을 뻬놓을 수 없다. 일제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는 뉴욕에서 기독교 활동과 사회 사 활동을

통해 동포사회에 헌신한 김 성은 뉴욕 한인사회 간 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존

스타 김이라는 미국명으로도 활동한 그 역시 뉴욕한인회 창설부터 여러해동안 사무총

장으로 실무를 맡은 인물이었다. 그는 가족을 고향에 두고 왔기 때문에 정착에는 어려

움이 있었지만 공병우와 함께 한 타자기 발명에 정열을 쏟은 나머지 풀어쓰기 한

타자기를 발명해 미국 내에서 제작, 활용한 기록을 갖고 있다. 1940년 와 50년 에

걸쳐 미국의 소리 방송국 근무, 유엔본부 통역 등을 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목회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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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史論 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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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 다. 이들은 1968년 3월 발족한 ‘뉴욕한인 주민회(Korean

Permanent Residents’Association)’의 주축 멤버들이었다. 당시 이 모임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강한모, 김형린, 김 성을 심으로 미국 주권이나

시민권을 소지한 김승만, 김인형, 유 술, 한 교, 등 원로그룹이었다.12)

당시 뉴욕한인회라는 기존 조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새로운 단체

를 조직했다는 사실은 미국정치 참여를 해 합법 인 신분을 가진 사람

들만이 모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여러 해를 거치면서 모임을 통해

미국정치 사회참여에 한 사업계획 등을 논의했으나 여건이 제 로

조성되지 않아 그 뜻을 크게 펴지는 못했지만 60년 후반기와 70년

에 걸쳐 소수의 한인들에 의해 그와 같은 노력이 기울여졌다는 은 특기

할만한 사항이다. 1970년 2월5일자로 일정이 잡힌 뉴욕한인 주민회의 정

기총회 소집 통보문에 나타난 참여 자격은‘한인 통의 남녀 21세 이상의

성년으로서 미국 시민권이나 주권을 가지고 본회의 규약에 찬동하는 분

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그 숫자가 많지는 못했으나 한인들의 권

익옹호를 해 미국정치 참여가 꼭 이루어져야 할 과제임을 일 이 인식

하고 모임을 통해 이를 실천하려 노력했으나 소수민족으로서의 짧은 역사,

미국사회에 한 한인들의 인식 부족, 그들 능력의 한계 등에 부딪 지속

되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1950년 를 거치면서 이들 원로그룹은 자유당 독재에 식상하면서 민간

이 주도하는 한인 커뮤니티 조직의 탄생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변화의 시

기를 맞게 되었다. 1960년 조국에서 일어난 4.19 학생 명에 뒤이어 탄생

한 민주당 정권에 기 를 걸면서 뉴욕한인회의 재건작업에 착수하게 되었

다. 뉴욕한인회 재건의 기 작업은 해방 기성세 가 담당했으며 한

민국 정부수립 후 미국에 입국한 은 유학생 그룹이 한인회 창설에 참여

12) 뉴욕한인회,『사반세기 뉴욕한인회』, 1985, 64쪽. ‘뉴욕 교포들이 미국 정치에 참여하

려는 단체 인 노력은 196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해 3월 발족된 뉴욕한인 주민회가

바로 그것이다. 뉴욕 일원의 미국 주권 시민권 소지자들로 조직된 이들은 회칙을

제정하고 친목단체로 출발했었다. 심인물은 강한모, 김형린, 김 성, 김승만, 김인형,

유 술, 한 교 등 과거 한인회를 이끌어 왔거나 원로 을 받고있던 유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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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으로서 커뮤니티의 모습을 갖추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기성세

와 은 유학생 세 가 한자리에 앉아 한인회 창설을 한 비회의를 진

행하면서 이견이 노출된 장면도 있었다. 고성을 지르며 상 방을 비난하

고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는 기성세 에 해 은 유학생 그룹은 못마땅

해 했지만 그들의 의견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참석자들은 말

했다.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에서도 일제시 조국을 잃고 타향에

서 고생한 원로들인 만큼 웬만하면 의견을 존 해 주자는 묵시 인 동의

가 이루어졌었다고 그들은 회고했다.

2. 새로운 이민

<표 2> 1950년대 한국인들의 미국이민 추세

년도 이민자 수비 이민자 수

(학생 방문자)

1950 10 335

1951 32 183

1952 127 808

1953 115 1,111

1953 254 1,270

1955 315 2,615

1956 703 3,552

1957 648 1,798

1958 1,604 1,995

1959 1,720 1,531

Total 5,528 15,198

(자료 출처 : 미연방 법무부 이민서비스국 연례 리포트)

한민국정부가 출범한 1948년부터 한국 쟁이 일어난 1950년까지 합

법 인 신분으로 미국에 이민 온 한인은 극히 드물었다. 미이민국 통계는

이 시기 한인이민자수를 107명으로 집계했다. 1950년 재 미국에 체류한

한인인구는 하와이 약 7천명, 미 본토에 약 3천명으로 모두 약 1만 명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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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악 다. 이후 1952년에 통과된 새로운

이민법은 국가별로 이민자 수를 할당하되 이미 미국에 이민해 살고 있는

해당국가 인구의 일정 비율을 배당하는 것이었다. 패트 매카런(민주당, 네

바다주) 상원의원과 랜시스 월터(민주당, 펜실베이니아주) 하원의원이

발의했기 때문에 매카런-월터법(McCarran-Walter Act)이라고 불린 이

법은 그때까지 주로 유럽 국가들의 백인 이민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을 인종이나 국가 인 차별을 없애고 이민 순 를 책정하여 모든 민족

에게 고루 용되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비 미국 이라는 이유로 당시 트

루먼 통령이 이를 비토하긴 했지만 결국 통과되어 그해 12월24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 법의 시행으로 이 까지 차별을 받았던 아시아 국가

들이 쿼터에 따라 이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부터 1945년까

지 국 을 잃었던 한국인들은 기존 이민자의 숫자가 미미했던 계로 최

소한의 숫자를 한 민족에게 배당하는 이스에 해당되어 매년 100명의 이

민쿼터를 배당받게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인의 미국이민 요람기라

고 할수 있는 1950년 체 이민의 숫자는 5,528명을 기록했다. 10명으로

시작된 1950년과 32명을 기록한 1951년은 두 자리 숫자에 머물 다. 그 해

에 발발한 한국 쟁도 원인이 되겠지만 일반인들에게 있어 미국이민은 가

능성조차 회박해 보이던 시 이었다. 127명이 이민한 1952년부터 57년까

지 세 자리 숫자로 증가를 보이다가 58년에 1,604명 59년에 1,720명으로

겨우 네 자리 숫자에 이르게 되었다. <표 2> 에서와 같이 이 시기의 주

권 취득자들은 주로 유학생, 의사, 간호사, 과학자 등으로 미국방문 신

분 변경을 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뉴욕한인회가 공식 창립되던

1960년 뉴욕일원의 한인 수는 4백여 명으로 채 5백 명이 안 되는 수 으로

추산되었다.(사반세기 뉴욕한인회) 그와 같이 일반이민으로 미국에 입국

한 한인들 외에 1950년 한국 에 참 한 미군과 결혼한 국제결혼 여성들

과 쟁고아들이 5천 명 정도 미국에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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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국제결혼 여성들의 미국이주 연도별 통계

연도 결혼 수 연도 결혼 수 연도 결혼 수 연도 결혼 수

1950 1 1960 649 1970 3558 1980 4825

1951 11 1961 405 1971 4484 1981 4700

1952 101 1962 692 1972 4407 1982 4326

1953 96 1963 1350 1973 4614 1983 4026

1954 116 1964 1340 1974 2925 1984 4248

1955 184 1965 1281 1975 3494 1985 4104

1956 292 1966 1225 1976 5126 1986 3810

1957 288 1967 1389 1977 4333 1987 4010

1958 410 1968 1356 1978 7710 1988 3903

1959 488 1969 1954 1979 5343 1989 2326

50년총수

198760년총수

11,64170년총수

42,04480년총수

40,278

연평균 199 연평균 1,164 연평균 4,204 연평균 4,028

1950년 발발한 한국 쟁은 한편으로 미국사회에 새로운 카테고리의 이

민을 증가시켜 계기가 되었다. 참 미군이나 군속과 결혼하여 미국에

입국한 소 ‘ 쟁부인’과 미국가정에 입양된 고아들이 상당수에 달했다.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이주한 국제결혼 여성들을 연도별로 집계(외무부

해외 이주과 제공)한 통계를 보면 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59년까지 10

년간 총 1987명으로, 이를 연간 평균으로 나 면 매해 200명 가까운 숫자

의 국제결혼 이민자들이 미국에 입국했다.<표 3>에서와 같이 이를 연도

별로 보면 1950년 쟁 첫해에 1명의 국제결혼 이민이 생겼고 51년 11명,

52년 101명으로 늘어났다가 53년 96명, 54년 116명, 55년 184명, 56년 292

명, 57년 288명, 58년 410명, 59년 488명으로 각각 증가했다.13) 해외주둔

미군 군속들이 배우자를 미국에 청하는 근거는 1945년에 제정된

쟁 신부법(War Bride Act)14)과 이 법을 보충하는 의미의 사병애인법(GI

13) 이부덕, 「국제결혼 한미여성의 공헌과 수난」,『재미 한인사회』, 외 양각, 1991, 308

쪽. 국제결혼 미국 이주 연도별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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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ances Act)을 활용했다. 이 법을 통해 쟁신부들이 공식으로 미국에 이

주하고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특혜를 얻었다. 이들 쟁신부나 GI 애인

들로 불린 국제결혼 여성들은 당시 한국에서 소득층에 속하는 계층이

많았으므로 학력도 낮고 미국사회에 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

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결혼 여성들의 미국이민에 한 여러 연구결

과가 나타나 있지만 그들의 부분은 한국인 커뮤니티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면서 미 역에 퍼져 거주하게 되었다. 남편의 가까운 친척들과 어울려

살던 국제결혼 여성들은 미국인들로 부터 인종 인 차별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미국 주권이나 시민권을 취득한 후

본국에 있는 직계가족이나 결혼한 형제자매를 미국으로 청하여 외로움

을 달래는 한편 훗날 미주한인사회의 팽창에 일익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

다. 본인 자신은 한국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더라도 그로인해 청된 수많

은 가족들은 미국의 도시를 심으로 형성된 한인 커뮤니티에 자연스럽

게 속하게 되었다.

한편 1953년 한국 이 휴 되면서 쟁 에 쟁고아와 혼 아들이 많

이 생기자 미국 내에 특별법이 제정되어 4,000여개의 비자쿼터가 마련되

는 한편 한국에서는 이듬해 이승만 통령의 지시로 특별법이 제정된 이

래 처음으로 쟁고아들의 미국이민이 시작되었다. 1956년 4,000여개의 특

별 비자가 소진되자 당시 아이젠하워 통령의 다른 특별법이 제정되

어 해리와 버다 홀트 부부에 의한 8명의 한국 어린이를 자기 가정에 입양

시킴으로서 홀트 양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매년 이들에 의한 고아 입

양이 계속되었다.15) 한 통계는1950-1964년 사이에 미국에 입양된 고아 수

14) 이 규, 『재미한국인』, 일조각, 1989년 , 49쪽. ‘그러나 제2차 세계 이후 많은 미

국 군인들이 동양과 서양 여러곳에 주둔하면서 그곳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 고 이들

은 미국시민의 배우자이기 때문에 시민권을 취득하여야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에 처하기 한 법이 1945년에 발표된 쟁신부법과 이것을 보충하는 사병애인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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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총 5,348명으로 나타냈다.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된 50년 의 쟁고아

들은 부분 좋은 교육을 받으며 양부모 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시기

기 때문에 한인 커뮤니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지역의 일부 양부모들은 그들의 입양아들을 커뮤니

티에 소개하고 한국문화를 섭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 게 자라난 입양아들은 성인이 된 후 생부모를 찾는 경향도 최근 늘어

나고 있다.

1950년 미국사회에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 다. 국의 속국

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도 있었고 계속 일본의 식민지로 오해하는 미국인

들이 많았다. 한국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한국 이 개되는 가운데 미군

들의 승 보가 보도될 때마다 심이 증 다. 그들의 아들, 형제들이 출

한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에 한 호기심이 날로 높아가면서 당시 한국

공 , 유학생 등 미국 거주 한인들에게 문의가 오거나 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사회에 ‘한국 알리기’ 행사가 각처에서 벌어졌다. 이때 미국

단체들에 의해 청을 받는 인사들은 주로 유학생들이 많았다. 한국공

이나 유학생회 등이 계획을 수립해 자발 으로 벌인 한국홍보 행사가 아

니고 미국 지 단체나 교회, 학교,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한 수동 인 형태

의 홍보 다. 뉴욕 지역에서 한국 알리기에 자주 청되었던 사람은 성악

가 김자경16)과 교육자 배상명17)이었다. 둘 다 여성이었고 그들 나름의 특

15) 윤사무엘, 『미국 한인교회 100년의 발자취와 비 』, 보이스사, 2002, 61쪽.

16) 리어드음 출신 성악가 김자경 녹취록 "때마침 구성된 ‘원 월드 앙상블’에 조인해

국투어를 하면서 공연 마무리에 한국을 소개하는 로그램을 진행했다. 당시 미국

신문에는 매일같이 한국 에 한 뉴스가 도배되다시피 했다. 사자 소식도 들리고

만 앙상하게 남은 쟁고아들의 참상이 TV화면을 장식할 때 다. 음악회는 한국을

소개하는데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출연진을 소개하면서 한국으로부터 온 김자경

이라고 인사를 할 때면 온 청 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그를 환 했다. 한국 선에

남편과 아들을 보낸 가족들은 음악회가 끝나면 무 뒤로 몰려와 한국에 해 한마디

라도 더 들으려고 야단법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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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한 기회들이 주어졌다. 이들 외에도 각 지역의 유학생들은 지역 학교,

교회 등으로부터 청을 받아 강연을 한 경우가 많았다. 이때부터 한국에

한 올바른 이해가 미국인들에게 해지기 시작했지만 일부지역에 국한

된 경우 다.

<표 4> 1950년대 국가별 해외 유학생 인정자 현황

연도

국별계 ‘53 ‘54 ‘55 ‘56 ‘57 ‘58 ‘59

합계 4,439 617 1,092 1,049 484 420 369 408

미국 4,017 576 1,041 963 429 359 299 350

국 25 5 3 4 1 3 5 4

서독 124 - 10 17 19 22 31 25

랑스 127 17 15 38 14 11 16 16

캐나다 41 13 12 5 4 1 4 2

자유 국 67 1 3 18 10 18 10 7

필리핀 18 1 3 3 4 4 2 1

이태리 20 4 5 1 3 2 2 3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유학생들이 속속 미

국에 입국했다. 정부수립 기유학생(1948년-50년)들은 의지할데 없는 미

국에서 한국 기간을 겪으며 어려운 고학생활을 견뎌냈다. <표 4>에서

와 같이1953년 휴 이 성립되면서 더욱 많은 학생들이 미국 유학길에 올

랐다. 이 에는 한국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한 사람들도 상당수 포함

17) 계당 배상명 선생의 교육과 그 생애 ‘천년수’ 배상명 선생 화갑기념사업회. 1966. 150

쪽. "이무렵 미국 교육계를 시찰하기 해 뉴욕을 방문 한국 발발로 발이 묶인

상명학원 창설자 배상명이 컬럼비아 티처스 칼리지에 등록을 했을 때 미국부인회가

그에게 ‘한국알리기 강연 투어’를 제의해 왔다. 컬럼비아 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

던 서두수, 오기형, 홍 설 등의 도움으로 한국역사, 한국문화, 한국사회에 한 강연

원고를 작성한 배상명은 각도시, 카운티를 돌며 고교, 교회, 학 등을 상으로 강

연을 했다. 강연료는 그의 생활방편이 되었고 강연을 통해 알게 된 유지들을 규합해

상명학원 국제재단을 뉴욕에 설치하는 성공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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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한국 문교부( 교육과학기술부)가 집계한 1953년부터 1967년까지 14

년 간 미국유학생 숫자는 6,845명이었다. 그 가운데 1967년6월30일 재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사람은 학사학 132명, 석사 492명, 박사학 취득

자 145명, 기타 13명으로 모두 792명이었다. 11%만이 귀국해 국가사회에

공헌했던 을 정부당국은 문제 으로 지 했다. 나머지89%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체재하고 있거나 정착한 것으로 단했다. 유학생뿐만 아니

라 회의 참석, 단기 기술훈련, 가족 방문, 상용 등 명목으로 출국해 지에

서 여행목 을 변경한 사람들도 많았다. 정부 측에서는 두뇌유출 방지책

으로 강력한 유학생 정책을 펴야한다는 을 강조했다.18)

유학생들은 그와 같은 본국정부의 까다로운 유학생 정책으로 인해 고통

을 겪었다. 학업을 마치면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귀국해 조국에 공헌하라

는 훈령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심리 인 압박을 받았다. 한 학기 정도

휴학을 하거나 학으로 인한 공백기가 생겨도 총 사 측에서 매년 여

권 연장 때마다 이를 체크하곤 했다. 심한 경우 본국에서 출발하기 2명

의 보증인을 세워 해당 학생이 귀국하지 않을 경우 보증인에게 책임을 묻

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이 때로 총 사 측의 처사에 해 항의하는 경

우도 생겼고 이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나다가 1960년 4.19

학생 명이 본국에서 일어나 희생자가 생기자 뉴욕의 일부 유학생들이 공

으로 몰려가 "학생들의 희생에 보답하라"는 래카드를 들고 시 를 벌

다. 이들 상당수가 그해 6월19일 발족된 뉴욕한인회 창설 멤버로서

활동했다.19)

18) 한국 문교부, 『해외유학생 실태조사』, 1968년 3쪽. ‘문교부가 해외유학을 통제한 이

래 선발(유학인정)에만 으로 치 하 기 때문에 10여년이 지난 오늘날, 고도의

훈련된 과학 기술자를 비롯하여 각 분야별로 훈련된 인원이 필요한 시 에서 볼때

유학생의 귀국이 크게 문제 으로 제기되고 있다.’

19) 뉴욕한인회, 『사반세기 뉴욕한인회』, 1985, 40쪽. ‘당시의 한인회 창립 동기는 때마침

한국에 불어닥친 민주 명 4.19의 여 로 뉴욕에 유학하고 있던 한인 유학생들이 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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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유학생들은 본국으로부터의 송 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부

분 학자 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교 내 아르바이트를

찾기도 하고 방학 때가 되면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가 힘든 고학생

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아르바이트로는 스토랑 일자리가 많았다. 식당

웨이터나 버스보이, 시닦이가 가장 많았고, 그 외에 잔디 깎기, 유리창

닦기, 집 주기 등 단순노동일자리를 얻어 등록 을 마련하곤 했다. 1940

년 와 50년 미국에 유학한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학업을 마치고 본

국으로 돌아가는 추세에 있었지만 60년 에 어들어서는 보다 느슨해

진 유학생 정책으로 인해 귀국시기를 늦추거나 아 미국에 귀화신청을

하고 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해 잔류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61년에 집권

한 군사정부가 해외 유학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책의 유연성을 발휘했

다. 당시 유학생 출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생들의 건의도 많았지만 해외

동포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던 군사정부가 수를 따기 해 마련한 포

퓰리즘 정책의 한 유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1950년 유학생 출신 귀

화를 통해 재미동포가 된 표 인 인사들은 김일평, 이범선, 학, 노용

면, 임길재, 장혜원, 고 림, 이정식, 김주진, 김옥 등이다. 이들은 공분야

를 그 로 살려 미국 학이나 병원 등에 근무하거나 비지니스를 하면서

60년 를 후해 형성된 한인 커뮤니티의 리더로서, 는 사자로서 활

약한 공로자들이다. 이들이 미국시민권을 취득한 후 직계가족들을 청함

으로서 미국 내 한인인구 증가에 요한 역할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후진

성을 면치 못했던 한국의 련분야 발 에 기여함으로써 건설 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로 꼽힌다.

욕총 사 과 유엔 표부에 몰려가 학생들의 희생에 항의하는 시 를 벌임과 동시에

이에 호응했던 일반 교포들의 민주 정신의 발로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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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 1950년대 유항생 출신 동포들의 한인사회 공헌도

이름 입국 학교 공 직업 한인사회 공헌

학 1947년 버지니아 주립의로버트 우드 존슨

메디칼 스쿨 교수재미한인의학 회장 미 한인우호 회장

임길재 1948년 존스합킨스 의퀸즈메모리얼 병원

산부인과 의사이화 국제재단 이사

개업의

고 림 1949년럿거스 정치학

하버드 박사

센트럴 커네티컷

교수

보스턴 한인회장

주미공사

윤종선 1951년 뉴욕 치과 치과 개업의 교회 주일학교 교사

김일평 1953년터키 주립

컬럼비아 정치학커네티컷 교수

뉴욕한인회 창설 공로

뉴욕한인유학생회장

장혜원 1953년 컬럼비아 화학 컬럼비아의 교수 이화 국제재단 이사

김 옥 1954년 로리다 주립 주미 사 상무 한국센터 건물 매입

차문 1954년 컬러비아 정치학 아시안 하우스 사장 뉴욕한인회 이사장

이범선 1955년 뉴욕 MBA 롱아일랜드 교수 제6 뉴욕한인회장

김주진 1956년펜실베니이아

와튼스쿨 MBA

빌라노바 교수,

코암 사장

필라한인학생회장

필라델피아 한인회장

노용면 1959년 뉴욕 의 법의학 뉴욕 퀸즈법의청장 재미한인의학 회장

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1948년 8월15일 한민국 정부수립

과 더불어 미국 수도 워싱턴에 주미한국 사 이 개설되고 뉴욕에 총 사

이 설치되자 숨가쁘게 돌아가던 조국의 해방정국을 망하던 재미동포

들은 진 하는 한미 계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뉴욕거주 동

포들은 미국에 성큼 다가선 조국의 미 계를 환 하면서 후속 차로 진

행되는 한국정부 기 들의 미국진출에 커다란 기 를 걸었다. 뉴욕에 가

장 먼 생긴 공 은 총 사 이었다. 이승만 통령의 특명에 따라 남궁

염이 총 사로 임명되고 공식 업무는 1949년 4월1일을 기해 시작했

다. 뉴욕시내 9 E. 80가의4층 건물을 매입해 지하실은 식당, 1, 2층은 사무

실, 3, 4층은 사 로 사용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미국인들의 숫자가 차

증가함에 따라 비자업무를 취 하는 미국인 서기 1명과 한국인 서기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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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에서 고용했다. 한국인으로 최계승이 오랫동안 일했으며 곧이어

외무부로부터 최용진 부 사가 견되어 사업무에 임했다. 1950년을

후해 정부 리, 사회 정치단체 임원, 각종사 단, 군 지휘 등이 자주 뉴

욕을 방문했다. 사 개설과 함께 총 사로 임명된 남궁염은 자유

당 정권이 몰락한 1960년까지 12년간 최장수 총 사로 재직했다.20) 그동

안 사 몇 명이 교체 을 뿐 뉴욕총 사 의 직원은 이 기간 크게 늘지

않았다. 총 사 에 이어 뉴욕에 설치된 공 은 유엔 표부 다. 한국

이 발발한 1950년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해 뉴욕에 체류 이던 외무장

임병직이 지에서 주유엔 사에 임명 다. 쟁을 치루면서 유엔과

미국의 원조가 주 임무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임병직은 엠 이어

스테이트빌딩 78층에 상주공 을 마련했다.21) 설립일자는 한국 쟁이 진

행 이던 1951년 11월6일로 되어있고 공식직명은 유엔 상임 옵 버

다. 임병직 역시 유엔 표부 개설부터 1960년까지 만 9년간 재임한 최장

수 유엔 사로서 이승만 통령은 주요 포스트에 배치된 자신의 측근들은

웬만해서 교체하지 않고 장기 근속시키는 인사행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융기 으로는 국책은행인 한국은행이 유일하게 1953년 뉴욕사무

소를 개설했다. 당시는 외환은행이 설립되기 이 이었고, 시 은행들이

외환업무를 취 하지 않던 때 으므로 외환에 한 모든 업무를 한국은행

20) 조종무, 『아메리카 륙의 한인 풍운아들』 상권, 조선일보사, 1987, 168쪽. ‘당시 이승

만 통령은 사 인사들을 제정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임명하여 공 경비의 일부

를 그들에게 떠맡기는 스타일이었다. 남궁 총 사는 뉴욕 근무 12년 동안 자가용 승용

차가 없었다고 한다. 본국정부의 지시 로 근검 약을 실천했고 직원들에게도 수증

없이는 한푼의 경비도 지출하지 않았다.’

21) 임병직, 『임병직 회고록』여원사, 1964, 401쪽. ‘본래 나는 동란 직후 유엔에서 상정되

는 한국문제 토의에 참석하기 해 외무부 장 직을 가진 채 수석 표로 견되었던

것인데 본국을 떠난 지 벌써 2년 유여가 된 것이다. 이토록 장 직을 오래 공석으로

둔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옳지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외무장 으로써 해외에 장

기간 주재한다는 것은 국가 체모에도 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장 직을 사퇴

하고 유엔주재 사로 임명을 받게 되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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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 (1945-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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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담하던 시기 다. 뉴욕사무소는 미국 융시장의 동태 미국경제

반에 걸친 자료를 수집, 분석하여 본국에 보내는 일이 주 임무 다. 맨해

튼 월스트리트 44번지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유창순, 2 정원훈, 3

김정렴, 4 이해명 사무소장 등이 근무했다.22) 한편 략물자로 분류되어

한국수출의 56%에 이르던 석의 미수출을 리하기 해 한 석주

식회사는 1957년 뉴욕지사를 설치하게 되었다.23) 이 지사는 석의 수출

업무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미 수출품목 체를 시하는 무역센터

역할도 했다. 맨해튼 56가(10W)에 6층 건물을 매입한 한 석 뉴욕지사

의 실제 개 일은 이듬해인 58년 3월26일이었고 같은 건물 내에 한국산

수출품 시 을 운 했다. 시 에는 3명의 직원을 두고 한국공 품, 병

풍, 한복, 견직물 등을 외부에서도 볼 수 있도록 시하면서 60년 반까

지 무역센터 역할을 했다.24) 50년 말 뉴욕에는 <표 6>에서와 같이 한국

정부기 외에 한국은행, 한 석, 천우사, 삼호무역 등이 지사활동을 하

고 있었다. 그 민간 무역회사로서 천우사와 삼호무역은 한국수출의 선

구자라고 할 수 있다. 삼호방 의 계열사로 설립된 삼호무역의 뉴욕지사

는 개설 직원 2명으로 시작 다.

22) 유창순( 국무총리,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 인터뷰 녹취록

23) �동아일보�, 1957년 2월 16일자에 ‘뉴욕에 한국 ’이라는 제하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미국 뉴욕시에 한국을 소개하는 ‘코리아 하우스(한국 )’가 설치, 개 될 정

이다. 15일 상오의 국무회의에서 김 상공장 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이번에 상공부 직

할 한 석주식회사에서는 뉴욕시 제5번가 서 56로에 있는 6층 건물을 구입하 는데

동건물은 1층을 한국공 품 시장, 2층을 한국을 소개하는 공보 시장, 3층을 한

석 사무실, 4층을 한국식 식당, 5층을 한국과 미국의 친선을 도모하는 의실로 선정

하여 제반 비를 완료하 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공부에서는 이미 시용 공 품 2만

3천여 을 동회 에 발송하 다고-"라고 보도했다.

24) 경향신문 1948년 4월3일자 "미국 뉴욕시에 설치된 한국 이 지난 26일 이 통령의 탄

신일을 기려서 정식 개 되었다"고 보도했다. 그와 같이 한 석 뉴욕지사는 1958년

3월26일 뉴욕시 10 W. 56 St. 소재 6층 건물에 지사 사무실 겸 한국 수출품 시 을

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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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 1950년대 뉴욕주재 한국정부 및 공공기관

기 명 진출연도 기 장

뉴욕총 사 1948년 남궁염

주유엔 표부 1951년 임병직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1953년 유창순

한 석 뉴욕지사 1957년

3. 주거지역

해방 한인들은 주로 맨해튼 100가로부터 125가 사이 로드웨이 서

쪽 부근의 아 트에 입주해 살았다. 뉴욕한인교회와 인터내셔 하우스,

컬럼비아 학이 가까운 치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유학생 출신들이 편의

상 맨해튼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모여 살았다. 이 지역은 해방 후에도 한동

안 유학생이나 노동자들의 주거지로 인기가 있었다. 유학생 수가 늘어나

면서 업타운으로부터 로드웨이를 타고 남하하면서 78가 쪽까지 차로

내려오는 형국을 보 다. 당시는 맨해튼에서 퀸즈로 연결되는 지하철이

생기기 이었기 때문에 요즘 한인들의 집단 주거지인 러싱 쪽은 염두

도 내지 못하던 시 이었다. 퀸즈로의 이주는 1964년 뉴욕월드페어(국제

박람회) 개막을 앞두고 개통된 7번 철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1955년 유학생 출신으로 후에 미국시민이 된 K씨는 컬럼비아 학에 다

니지는 않았지만 학 근처 로드웨이 110가에 1베드룸 아 트를 190달러

에 얻어 한국 학생 3명이 룸메이트를 했다. 한방에 서울, 구, 남 등 출신

이 각기 다른 청년 3명이 어려운 시기에 다투지 않고 잘 지냈다고 한다.

1955년 서부 지역에서 학을 다니다 50년 말 컬럼비아 학원에 진

학한 P씨 역시 후에 미국시민이 되었지만 그 역시 학 근처 맨해튼 113가

로드웨이 싸구려 아 트에서 자취를 했다. 방값이 1주일에 10달러씩, 식

비를 합쳐 한달 생활비가 1백 달러 미만이었다. 50년 반 리어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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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교에 유학생으로 온 성악가 K씨 부부는 허드슨 강변 쪽 리버사이드

드라이 120가에 3베드룸 아 트를 얻어 하숙을 쳤다. 주로 리어드에

입학한 후배들에게 방 하나씩을 독립 으로 쓰게 하고 숙식을 제공했다.

1959년 역시 유학생으로 와 미국시민이 된 C씨도 처음 뉴욕에 도착,

로드웨이 79가에 있는 아 트에 잠시 기거하다가 101가 로드웨이 아

트로 옮겨 한국인 세 명이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 이 지역의 아 트들은

낡기는 했지만 우선 방값이 싸고 입주가 수월했다. 한 층에 조그만 방이

여러 개 있고 화장실과 샤워실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좀 불편했지만 쉽게

옮길수 있는 장 이 있어서 인기가 있었다. 지하철이 가깝게 연결되는 장

도 있었다. 로드웨이 90가에서 120가까지, 리버사이드 드라이 나, 웨

스트 엔드 애비뉴, 앰스터담 애비뉴를 따라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1960

년 에 들어와 퀸즈와 루클린 쪽으로 확산되는 모습을 보 다. 1964년

러싱 메도우즈 코로나 크에서 개막된 뉴욕 월드페어에 참가한 한인들

의 상당수가 부근 러싱이나 에름허스트 등지에 정착했고 같은 시기 한

인 의사 간호사들의 거 이민으로 퀸즈나 루클린 지역의 종합병원

근처가 한인들의 집 주거지역으로 선호 상이 되었다.

1950년 한인들의 경제 응

해방 후 뉴욕일원에서 자기 사업을 경 하는 한인들은 그리 많지 않

았다. 1920년 뉴욕에서 은행 근무를 했던 유일한25)이 디트로이트에서

라 이란 식품 제조회사를 운 하면서 국 인 지명도를 가졌던 외에 규

25) 유한양행, 『나라사랑 참 기업인 유일한』, 유한양행, 1995, 96쪽. ‘일한 자신도 경험했

듯이 많은 국인들은 동양과 국에 한 깊은 향수심에 젖어 있었고, 미국에서도 사

용해야 하는 일상품들을 국 것으로 골라 직 다면 그 호응이 클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뜻은 되었다. 그는 국 향취가 담긴 동양제품들, 즉 손수건, 일상

용품, 장식도구, 크게는 카펫까지도 직 국인들을 찾아다니며 팔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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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있는 비지니스를 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부나 서부에 비해 동부

쪽 한인들의 비지니스는 특기할 만한 성공담이 해지지 않고 있다. 상

으로 유학생들이 많았던 이 특징이었다. 그 가운데 몇 명의 상인들이

주로 차이나타운을 통해 유통되는 동양상품의 간도매상을 경 하고 있

었다. 하와이 이민단의 통역으로 왔다가 뉴욕으로 이주한 안정수가 맨해

튼21가(165W.)에서 소형장식품을 매하는 Miniature Arden Ornament

Co.를 경 하면서 재산을 모았고, 차이나타운에서 동양물산상 을 경 했

던 이진일, 맨해튼 43가(100 W)에 "The Korea’ 라는 상 을 열고 동양상

품과 차 등을 매했던 임 , 커머스 스트릿에서 식품 제조회사 Oriental

Food Product 를 경 하면서 외국상품 수입과 도매도 겸했던 안승화가 있

었다. 그나마 해방이 되면서 부분이 귀국하는 바람에 자 업자 수가

어들었다.

해방 후까지 사업을 계속했던 사람은 김형린이었다. 안승화가 운 하던

식품 소매 도매회사 Oriental Food Product(19-23 Commerce St. 소재)

를 인계받아 70년 까지 부인 김랑과 함께 운 했다. 외국상품 수입과 도

매도 겸한 사업체 으나 김형린이 수받은 부분은 찹수이를 만드는 식품

공장이었다.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한국과의 무역이 소규모로 진행되면

서 새로운 비지니스로 한국산 램 가 서상복에 의해 수입되었다. 한국산

램 와 함께 공 품을 수입한 차문 26)은 미국식 비지니스로 성공한 이

스 으며 소규모로 한국산 돈모를 수입했던 김주진27)도 일 이 비지니스

26) �뉴욕 한국일보�, 2011년 7월14일자, ‘뉴욕한인이야기’ 차문 편. 컬럼비아 를 다니

던 차문 은 50년 말 뉴욕시내에 동양램 와 공 품 도매 소매상을 오 한 후

유학생 세 의 비지니스 선두주자 다. 맨해튼 56가 7애비뉴 코 에 1,2층 8천 스퀘어

피트 규모의 형 매장 ‘에이시언 하우스’를 열고 같은 장소에서 40여 년간 비지니스

를 이어나갔다. 차문 의 램 는 일류 백화 에서도 볼수 없는 독창 인 것이어서 실

내 장식가들의 길을 끌었다. 실 이 오르자 웨스트체스터와 롱아일랜드, 뉴 지

번 등에 연쇄 을 열고 물량을 기 해 퀸즈 롱아일랜드 시티에 형 창고를 매입

했다. 이때(1966년) 연방정부로 부터 소기업 자 (SBALoan) 5만 달러를 출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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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을 뜬 학생이었다.

이들 소수 자 업자들 외에 문직에 종사하던 동포들의 숫자가 더 많았

다. 해방 부터 거주해 오던 기성세 와 해방 후 새로운 세 로 등장한

유학생 출신 가운데 한인 커뮤니티에 심을 보인 인물들은 부분 학을

졸업했고 그 에 석사, 박사학 를 취득한 고학력자들도 많았다. 이들의 직

업을 보면 학 교수, 의사, 고교 교사, 학 도서 사서, 목사 등 문직

외에 동양물품을 취 하는 무역업과 부동산 개업과 같은 서비스업 종사

자도 있었다. 해방 세 로서 한인 커뮤니티 형성에 공을 들인 강한모28)

는 뉴욕시에서 고교 교사로 있었으며 김배세는 롱아일랜드 도서 사서,

이해경은 컬럼비아 도서 사서로 각각 근무했다. 후 미국 유학생 가운

데 상당수가 의 에 들어가 인턴 지던트를 끝내고 의사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유학생 출신으로 한국 에 해병 장교로 참 , 미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통역으로 함흥 철수작 때 민간인 철수를 막후에서 지휘했던

학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필라델피아와 뉴 지 한인사회에 공헌했다.29)

산부인과 여의사로 이 동 문병원 창설자 의 한사람인 임길재30)도 존

스 합킨스 학과 뉴욕의 여러 병원에서 랙티스를 마치고 한인 최 의 산

27) 조종무, 『아메리카 륙의 한인풍운아들』 하권, 조선일보사, 1988, 174쪽. 펜실베이니

아 워튼스쿨에 재학 이던 김주진은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경 하던 부친이 보내주

는 돈모(돼지털)를 뉴욕의 수입상들에 넘겨주는 간 상인으로 돈을 벌었다. 학자 과

생활비를 해결하고 후에 아남 자의 모체가 된 암코 자회사를 필라델피아에 설립하

는 원동력이 되었다. 1950년 한국산 돈모는 미국에서 러쉬의 원료로 사용되는

석 다음으로 인기 품목이었으나 질이 떨어지는 상을 보 다.

28) �뉴욕 한국일보�, 2011년 6월16일자, ‘뉴욕한인이야기’ 강한모 편. 그는 오하이오 트

에서 생물학을 공, 제2차 세계 때 미육군 특수부 인 OSS에 차출되어 정보분

석 으로 복무한 경력으로 후 뉴욕에서 고등학교 교편을 잡았다. 뉴욕시 스티 슨

고교의 생물학 교사로 15년간 직했다. 랑스계 교사 콘스탠스 나지와 결혼, 미국에

정착한 몇 안되는 국제결혼 이스 다.

29) 학( 로버트 우드 존슨 교수) 인터뷰 녹취록.

30) 한인최 의 산부인과 개업의 임길재 인터뷰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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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개업의가 되었다. 뉴욕 에서 법의학을 공부했던 노용면31)은 공

을 살려 뉴욕시 퀸즈법의청장을 역임했으며 학과 노용면은 후에 창설

된 재미한인 의사들의 국 조직체인 재미한인의학 회장을 맡아 한미 간

의료정보 교환 등을 통해 한국 의료계와 교류를 텄다.

미국 학계로 진출한 유학생들도 많았다. 컬럼비아 서 국제정치학을

공했던 김일평은 당시 공산권 문제의 문가로서 미국과 한국에서 인정

받는 학자가 되었으며 고 림과 이정식은 정치학 교수로서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특히 고 림은 센트럴 커네티컷 교수로 한때 주미 사 공사

로서 본국을 해 일했으며 그의 3남 해롤드 고는 훗날 미국무부 인권담당

차 으로 미국정부를 해 일했다. 회계학을 공, 롱아일랜드 교수가

된 이범선은 학창시 뉴욕한인회 창설에 참여했다가 후에 뉴욕한인회장

을 역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단순 노동직 근로자들도 제법 있었다. 계약이 끝난 하

와이 노동이민자로서 본국으로 이주해 철도공사와 교량공사 등 막노동에

종사한 동포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커뮤니티 행사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뉴욕한인교회

의 교회 명부에 직업이 기재되지 않은 교인 상당수가 노동직이었던 것

으로 보인다.

50년 한인단체 기

해방 직후 뉴욕에 조직 인 한인 커뮤니티는 존재하지 않았다. 종교기

인 뉴욕한인교회가 유일한 한인사회 공회당의 장소로 해방 부터 존재

하고 있었다. 당시 한인들과 련된 연례행사는 8.15 복 겸 한민국

31) �뉴욕 한국일보�, 2011년 10월 20일자 ‘뉴욕한인이야기’ 노용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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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기념식, 3.1 기념식, 그리고 해마다 본국으로 부터 유엔 총회

시기를 맞춰 10월경 찾아오는 유엔 표단의 뉴욕 방문을 환 하는 행사

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뉴욕에는 몇 안 되는 기 과 단체들이 그런

로 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해방 후 새로이 조직된 뉴욕한인

유학생회와 곧이어 국 으로 조직된 미주유학생총회가 학생그룹을

표하고 있었고 미국무성 산하기 으로 창설된 미국의 소리 방송이 한인들

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한국 직후에는 총 사 을 심으로 각 단체

를 표하는 인사들로 제성격의 한인회를 구성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함께 치 던 것으로 밝 졌다.

1955년 가을 컬럼비아 , 뉴욕 재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뉴욕지역 유

학생회를 창립했다. 컬럼비아 얼홀에서 50여 명의 유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장에 백선기를 선출했다. 창립 기 2백 명에 가까운 학생들

이 각종행사에 참석했다. 한인회가 창립되기 이었으므로 3.1 기념식,

여름방학 피크닉, 8.15 기념식 등을 학생회가 주최했고 연말 티도 열

었다. 이 무렵 한국 휴 이 성립되면서 더욱 많은 학생들이 미국유학의

길에 올랐다. 김일평, 민병기, 김정원, 강원룡, 이한기, 노신 , 신병 , 김

은우, 이정식, 김옥열, 정세 , 학, 이범선, 김 섭, 차일석, 구두회, 홍

순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이듬해 창설된 재미한인유학생연합회 국

조직을 통해 모국에 도서 보내기 운동을 개했다. 휴 후 학업으로 돌

아간 학생들에게 마땅히 읽을 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뉴욕을 심으로

조국에 한 선물캠페인을 벌 다. 이들의 열성에 감동된 세계 학 사

회가 가치있는 사업임을 인정하고 운임일체를 부담했다. 이를 통해 모집

된 도서 1만2천권이 한국으로 수송 다. 백선기, 이동원에 이어 정 엽, 박

무승, 명태진 등이 유학생회를 이끌었고 김일평 회장 시 에는 뉴욕한인

회 창립에 력했다. 비 원회로부터 시작해 회칙제정, 집행부임원 등

으로 참여했다. 이때 학생그룹으로 노재 , 노정 , 김일평, 이범선, 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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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 김승만, 어근 등이 함께 참여했다.32) 이때까지 유학생들은 이승만정부

의 까다로운 유학생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학업을 마치면 지체하

지 말고 곧바로 귀국해 조국에 공헌하라는 지시에 따라 학업도 여권연

장을 까다롭게 리해 많은 학생들이 애를 먹었다. 이런 행은 군사정권

이 들어서면서 해소되기 시작했다. 본국정부가 해외유학생정책을 완화시

킨 계기가 있었다. 명정부가 1961년 국군의 날 행사에 재미유학생 표

들을 청했다. 이때 참가한 표들은 뉴욕의 백선기, 보스턴의 김경원, 워

싱턴 오기창, LA 김종식, 샌 란시스토코 명제등 5명이었다. 이들이 병

역미필 학생들의 여권기간 연장 등 7개 항의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 이 안

이 받아들여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곧이어 해외유학생정책에 일 환

기를 맞았다.

뉴욕한인유학생회는 김일평 이후로 김진 , 계원창, 어근, 나필열, 최병

철, 김 철, 강 국, 이 우, 신선희 등으로 이어졌다. 60년 후반 들어 학

생회활동이 차츰 약화되다가 70년 그 맥이 끊겼다. 쇠퇴원인에 해 당사

자들은 상 으로 한인회가 활동 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했다. 1960

년 만 해도 그 워가 컸던 유학생회 주축멤버들이 보다 규모가 커진 한

인회에 들어가 활동하거나 그들 상당수가 귀국했기 때문이다. 1958년

한국의 독재정권 부패상이 뉴스를 타고 해질 때마다 분개한 유학생회의

일부멤버들이 민우회라는 학생서클을 만들어 주1회 토론시간을 가졌다.

주로 세계정세, 유학생들의 문제, 한국의 독재정치 등이 토론의 이슈가 되

었다. 이후 1963년 복 을 맞아 ‘8.15의 의의’ 라는 명제 아래 당시뉴욕의

지식층을 망라한 토론그룹이 형성 다. "우리 민족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물음이 63학회의 출발 이 되었다.33) 백선기를 비롯하여 노재 , 김

32) 뉴욕한인회, 『사반세기 뉴욕한인회』뉴욕한인회, 1985, 35쪽. ‘뉴욕의 컬럼비아 학과

뉴욕 학 재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국내 소식도 서로 해 들을겸 학생들끼리 의견을

교환하고 친목을 도모하자는 주장들이 나와 이해 가을 컬럼비아 얼홀에서 약 50명

의 학생들이 모여 뉴욕한국유학생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33) 조종무, 『아메리카 륙의 한인 풍운아들』 하권, 조선일보사, 1988, 35쪽. ‘백선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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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김신행, 차인석, 김 근, 김일평, 김정원, 손창문, 어윤배, 김상 , 홍

원택, 김경원, 유세희, 이형, 차 웅 등 30여 명의 재뉴욕 사회과학도들이

매달 한 번씩 돌아가면서 국토론을 벌 다. 때로는 학술논문의 구상을 발

표해 토론도 하고 어떤 때는 주제 없이 만나 토론의 폭을 넓 갔다. 이들

상당수가 귀국해서 학계, 계에 종사하거나 사회활동을 벌 다. 회원

김일평, 김 근, 손창문 등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 세계를 향해 발사되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이 해방 3년 인 1942년 2월24일 뉴욕에서 첫 를 보내

기 시작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지 2개월 후에 창설된VOA는 시

방송의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창기에는 미 국무성의 국제방송과가 주

하면서 어 외에 독일어와 스페인어 등 3개 국어로 방송했다. 샌 란시

스코방송국을 키스테이션으로 몇 개 지역의 계로 태평양과 서양을 향

해 를 발사했다. 세계 의 와 에서VOA는 쟁에 한 뉴스와 함

께 심리 의 기능을 수행했다. 나치 독일에 고통받던 유럽인들과 일본제

국주의 침략으로 신음하던 아시아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

다. VOA는 창설 6개월 만인 42년 8월29일부터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다.

한국어 첫 방송의 아나운서는 유경상이었다. 이때 샌 란시스코방송국에

서 발사된 한국어 방송은 ‘자유의 종은 울린다’라는 30분짜리 로그램이

었다. 애국가와 자유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고국에 계시는 동포여러

분, 지 부터 미국에서 보내드리는 자유의 소리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유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2천만 동포에게 고한다.’는 이승만 박사

의 유명한 연설이 방송 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2천5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디서든지 내말 듣는

이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을 하려는 것은 제일 긴요

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로 시작되는 이박사의 연설은 VOA를 통해

매일 되풀이 방송되었다. 한 태평양 쟁에서 매일 매일 일본이 불리해

1963년 복 을 맞아 8.15를 이성 으로, 객 으로 재검토하자는 명제 아래 당시

뉴욕에 있던 지식층 인사들을 망라한 토론그룹 6.3학회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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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가는 쟁뉴스도 상세히 보도 다. 쟁 세계 40개 언어로 방송되다

가 후에는 24개 언어로 어들었지만 한국어 방송은 그 요성 때문에

후에도 계속해서 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북한이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미소 간 냉 이 노골

화되면서부터 한국어방송은 더욱 비 이 커지고 있었다. 유경상에 이어

두 번째 아나운서로 황재경이 입사한 1949년 VOA방송국은 뉴욕시내

로드웨이 57가에 있었다. 업무는 미공보처가 주 했고 당시 한국어 과장

은 로스토 다. 뉴욕이나 워싱턴본부에서 송신된 VOA의 단 방송

은 태평양을 건 8천 마일이나 떨어진 필리핀의 계탑에 잡혔다. 여기서

증폭된 단 를 다시 극동지역으로 보내기 때문에 말소리가 끊어졌다 이어

졌다하는 상태가 되풀이 다. 역시 고르지 못하게 마련이었다.34)

VOA는 한편 미국에서 고학하던 유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기

만 해도 3-4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VOA한국어방송은 한국 이후로는 15

명 정도로 늘어났다. 더러는 트타임으로 일했으나 VOA를 거쳐간 수많

은 아나운서와 집필자들이 있었다. 한국 기간 쟁뉴스가 VOA 방송의

거의 부를 차지했다. 24시간 쏟아지는 쟁뉴스의 홍수에 한국어과 일

손은 크게 달렸다. 아침, 녁 30분간 내보내는 뉴스방송 외에 도시사 해

설, 논평, 미국인의 생활, 마이크 탐방과 같은 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일

손이 크게 모자랐다. 이때 뉴욕일원의 유학생들과 이 시작 다. 50년

7월 컬럼비아 학원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던 박 규가 정식직원으로 들

어왔고 역시 박사공부를 하던 김 섭과 설원식 등 10여 명이 트타임으

로 일했다. 유니언 신학교의 학, 홍 설 등 학자들도 동원 다. 고려

김 섭 교수가 1년 이상 뉴스와 시사해설, 원고의 번역을 맡는 등 이

때의 VOA 한국어과 스태 는 막강했다. 이무렵 아나운서진도 보강되었

34) 황재경 회고록. 1985년부터 86년까지 워싱턴에서 발간된 미주복음신문에 연재된 황재

경목사 회고록 ‘미국의 소리 방송’ 부분(33회-38회)을 발췌한 것. 방송인, 목사, 음

악인으로 유명했던 황목사는 1946년 첫 도미 후 48년부터 73년까지 25년간 ‘미국의 소

리’ 방송에 근무하면서 한때 워싱턴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 1984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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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황재경 외에 이계원, 민재호에 이어 호기수, 김소 등 여자아나운서들

의 모습도 보 다. 한국 이후 미국과 소련 간 냉 이 극심했을 때 VOA

는 매주 한번 씩 사상투쟁이라는 특별 로그램도 방송했다. 1954년 10월

VOA는 뉴욕시 를 마감하고 워싱턴시 를 맞았다.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항일독립운동 련 사 지인 뉴욕한인교회는

1921년 4월18일 창립되었다. 미국감리교단의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당시

주소는 459 W. 21가 다가 1927년에 치 663 W.115가로 이 하여 건

물을 보존하며 재에 이르고 있다. 창립 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당

시 감리교인 이었던 앤지 킴벌랜드(Mrs. Angie Graham Kimberland)여사

와 한국에서 20여 년간 선교 사업에 종사했던 존스(한국명 조원시)여사,

그리고 컬럼비아 학에 재학 이던 조병옥이었다. 조병옥은 근 한국

이 낳은 정치가이자 지도자 다. 이들은 그해 맨해튼 43가 타운홀에서 열

린 3.1 기념식에 참석한 후 같은 장소에서 교회 창립에 한 구체 인

토의가 이루어졌다.35) 당시 유학생들과 정치 망명자들이 민족운동의 거

으로 활용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한 이곳은 해방 후를 통해 뉴욕일

원 한인들에게 신앙 인 안식처 역할을 하면서 종교목 외에 한인회, 학

생회, 국민회, 동지회, 흥사단, 그리고 사단체들의 각종 집회와 일시거소

로 사용되는 등 한인들의 정신 인 센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조국을 잃은 망국민들의 설움을 달래던 유서 깊은 장소 다. 그런 의미에

서 교회의 문 명칭을 ‘The Korean Church and Institute’라고 지었다.

교회가 성 인 동시에 민족을 해 국가 사회 사를 해야 한다는 뜻

이 담겨져 있다.

이 교회를 통해 한인사회 목회자들도 여러 명 배출 다. 역 담임 목사

가운데 디오도어 루즈벨트 통령을 이승만과 함께 만났던 윤병구36)유엔

35) 최병 ,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깊은샘, 1992에서 발췌.

36) 최병 ,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깊은샘, 1992, 500쪽. 1882년 12월27일 서울 출생.

구한국외국어학교 졸업. 이 당시 기독교 신자가 됨. 서울에서 선교사, 통역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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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역임한 임창 37) 등이 있다. 일제시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김

도연, 장덕수, 최순주, 이철원, 오천석, 김활란, 정일형 등 한국의 정치지도

자들이 이교회를 밟았고 1930년 당의 작가 강용흘이 이 교회에 묵으

면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애국가가 발표되던 시기 안익태의 작곡 장소로

도 자주 사용 다. 한 해방을 후해 최 의 한 타자기 제작 장소로도

유명하다. 교인 이원익, 송기주, 김 성 목사 등에 의해 여러 해에 걸쳐 여

러 형태의 한 타자기들이 개발되고 제작된 가운데 공병우타자기의 탄생

도 맥을 같이한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교인들로 인해 50년 의 교인 수

는 60명 선을 오르내렸고 주일 출석 교인은 20-30명 선에 머물 다. 주로

학생들이었고 사업과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각종 친목회, 애

국단체들의 집회, 크리스마스를 기한 연말 집회, 3.1 기념식에는 신자가

아닌 동포들도 참석했다.

1960년 6월12일 체계가 잡힌 뉴욕한인회가 이곳에서 창설(재건)되었으

며72년 10월 한국에서 선포된 유신을 기 으로 군사정권에 한 반감이

고조되다가 본격 인 민주화운동이 뉴욕한인교회를 심으로 시작 다.

뉴욕 한인민주화운동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목요기도회가75년부터 시작

1897년 Herber Jones 목사에게 세례. 1903년 하와이 이민들의 목사 송 요청에 따라

선출되어 도미. 1905년 8월 이승만과 함께 디오도어 루즈벨트 통령 면담. 1929년 뉴

욕한인교회 목사로 시무(3 ). 경제공황 때 뉴 지서 농장경 . 1949년 서울서 타계.,

37) 임창 ( 유엔 사) 녹취록. 평양 숭실 문 출신인 임창 은 서재필이 한때 다녔던

라 트 학에 유학한 것이 인연이 되어 해방직후 서재필의 조국방문에 동행한 비서

로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해방 에는 린스턴 박사로서 구미 원부 활동을 통

해 이승만과의 교류도 있었으며 뉴욕한인교회 목사로서 한인사회와 연 도 가졌다.

해방 후 이승만 독재시 학자로서 이를 비 한 것이 동기가 되어 반독재 인사로 낙

인이 혔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유엔 사로 임명되었으나 5.16 쿠데타로 인해

짧은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60년 와 70년 를 통해 뉴욕주립 교수 시 한국의 군

사정권을 정면으로 비 하면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부역할을 담당했다. 80년

미국에 망명해 있던 김 과 함께 반독재 투쟁의 선 에 나서기도 했다. 그의 민주화

운동은 90년 들어 통일문제로 발 되었으며 이때 학자의 입장에서 북한쪽의 통일의

지를 확인하기 해 북한을 방문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후 한인사회로부터 친북인

사라는 평을 들었으며 실제로 북한은 그에게 국기훈장 제1 과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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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 녁, 뉴욕한인교회에 뜻을 함께 한 동포들이

모여 조국의 우려스러운 실에 해 의견을 교환했다. 당시 주역들은 뉴

욕한인교회 한승인 장로를 비롯해 임순만, 이승만, 김윤철, 김홍 , 안 식,

유태 등이었고 뉴욕 한인교회와 련된 인사들이 주로 참석했다. 기도

회 장소는 115가 교회 지하실이었으며 회원들은 한국에서 진행되는 민주

화운동에 한 정보교환, 투옥당해 고생하는 민주인사들과 학생, 노동자

들을 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보낼 헌 도 모았다. 강연회도 열려 국내 민

주인사들이 청 다. 함석헌, 김재 , 문동환, 이우정, 그 고리 헨더슨,

백기완, 김찬국 등이 청 다.38) 시간이 흐르면서 목요기도회는 반정부

이라는 인식이 확산 고 정치 인 입장표명이 늘어났다. 기도회 참석자

들이 차차 불어나 최효섭, 김윤국, 김정순, 이윤구, 손명걸, 함성국, 박성모,

한성수, 김 철, 임병규, 김마태, 장한량, 한완상, 심재선, 민승연, 손홍민, 구

춘희, 이진옥, 양우석, 송학린, 김 묵 등이 부분 부부동반으로 참여했다.

한편 1970년 반 한인들의 규모 이민에 따른 커뮤니티 형성기를

맞아 뉴욕한인 사센터와 가정문제연구소 등 사기 들이 이곳에서 출

범하는 등 한인사회 사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민간 차원의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이 뉴욕총 사 이 주도하는

뉴욕한인회가 1950년 구성 다.39) 편의에 따라 한인회장은 남궁염 총 사

가 겸임, 최용진 사가 부회장을 맡았다. 그로부터 매년 실시된 8.15 복

기념식 정부수립 기념식과 3.1 기념식, 유엔 표단 환 식 등 공식

행사에 정부기 융기 주재원, 유학생 표와 일부 민간인들이 참

석했다. 한국 을 계기로 공사다망해진 남궁염 총 사는 워싱턴 시 이

승만과 함께 구미 원부에서 활동했던 민간인 이원순에게 뉴욕한인회장

의 바통을 넘겨주었다. 통과의례를 거쳐 한인회장에 선출된 이원순은 그

38) 최병 ,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깊은샘, 1992, 306쪽.

39) 뉴욕한인회, 『사반세기 뉴욕한인회』, 뉴욕한인회, 1985, 26쪽.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6.25 직후 총 사 남궁염이 한인회장, 교민담당 사 최용진이 부회장으

로 있었으며 이듬해인 1951년 3월에는 이원순이 한인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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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독립운동 비지니스 경험을 살려 활동했다.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

되어 있지 않던 시기 으므로 주로 조국을 해 애국심을 발휘했다. 그는

1947년 6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올림픽 원회(IOC) 총회에 한국올림

픽 원회(KOC) 표로 참석해 한민국의 IOC 가입 승인을 받고 이듬해

열린 런던올림픽(1948년)에 한국선수단의 처녀출 길을 터놓은 공로자

다.40) 1953년 귀국길에 오른 이원순은 당시 인기가 있던 ‘미국의 소리 방

송’ 민재호 아나운서에게 뉴욕한인회장 후임을 맡겼으나 그 역시 오래 재

임하지 못했다. 다음해 10월 미 국무성 산하기 인 ‘미국의 소리 방송’이

워싱턴 DC로 이 했기 때문이었다. 민재호는 워싱턴으로 떠나기에 앞서

때마침 뉴욕에 부임한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 유창순에게 후임을 넘겨

주게 되었다. 유창순은 임기동안 매년 연례행사를 치 다. 이무렵 뉴욕지

역 한인유학생회가 창립되는 시기여서 이후로 학생들의 역할이 커지면서

상 으로 한인회의 활동이 어드는 상이 나타났다. 그와 같은 제

성격의 뉴욕한인회는 유창순이 57년 말 뉴욕총 사 의 최용진 사에게

모든 것을 이양하고 귀국한 이후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41)

40) 이원순( 뉴욕한인회장, KOC 부 원장) 인터뷰 녹취록. 1914년 하와이로 이민, 그

곳서 자동차 행상, 가구 운 , 부동산 개업 등으로 재산을 형성한 이원순은 이승

만의 독립운동을 도우며 워싱턴으로 이주해 살다가 해방 직 단체간 이견으로 생긴

이승만과의 불화로 인해 귀국하지 않고 뉴욕으로 근거를 옮겨 부동산 개업으로 성

공한 비지니스맨이었다. 뉴욕시내 바워리 섹션의 형 교회(105-109 Houston St,)를

30만 달러에 매입해 한동안 자신이 거주하다가 50만 달러에 는 수완을 발휘했다. 부

동산에 재미를 붙인 그는 싯가 안쪽 되는 건물들을 여러 채 사들여 약간의 손질을 한

다음 되 는 방식의 부동산 투자를 통해 거부로 발돋움했다. 교회를 팔고 해변가 뉴로

셀에 1에이커 짜리 택을 구입해 살면서 1951년 제 성격의 뉴욕한인회를 남궁염

총 사로부터 인계받아 그가 귀국한 1954년까지 한인회장으로 활동했다. 부동산 경력

을 인정받은 이원순은 한국정부 수립 직후 워싱턴 주미 사 건물을 매입할 때 워싱

턴에 한동안 체재하면서 이를 성사시킨 공로도 있었으며 한국 해군이 최 로 보유하

게될 함정을 구입하기 해 김세선 주미 사 참사 을 안내하여 롱아일랜드 일 를

뒤지다가 해양 학에서 형의 함정 한척을 발견해 낙찰받은 도 있었다. 이 함정이

한국 에도 참 한 해군 1호 투함 백두산함 이었다. 그는 미군정청 보건후생성 고문

으로 먼 귀국한 부인 이매리(7 국회의원)와 가족결합을 해 막 한 재산을 갖고

1953년 귀국했다. 귀국 후 한때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고 1993년 103

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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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7> 1945-1959 재미한인사회 주요 사건

사건 발생연도

서재필, 미군정장 고문으로 임명되어 귀국 1947년 7/1

이원순, 스톡홀름 IOC 총회에 한국 표로 참가 1947년 8월

새미리, 제14회 런던올림픽 다이빙서 메달 획득 1948년 8월

뉴욕총 사 개설 1949년 4/1

보스턴 마라톤 제패 …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선수 1950년 4/12

성악가 김자경, 카네기홀 독창회 1950년5/5

이승만 미국방문 … 뉴욕서 티커테이 퍼 이드 1954년 7/25

피아니스트 한동일, 카네기홀 데뷔 1955년 3월

뉴욕한인유학생회 창립 1955년 9월

필라델피아 유학생 오인호 피살 사건42) 1958년 4/25

주제어 : 한인 이민, 뉴욕 한인사회, 재미한인사회, 해방 후, 1950년

, 뉴욕 일원

(논문투고: 2012.12.3 / 논문심사완료: 2012.12.14 / 논문게재 확정일: 2012.12.17)

41) 유창순( 국무총리,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 인터뷰 녹취록

42) 이창희, 『필라델피아 한인사』, 필라델피아한인회, 1995, 70쪽. 1958년 4월25일 펜실베

이니아 학원에 유학 이던 오인호가 흑인 청소년 갱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

했다. 이때 본국에 있던 그의 부친 오기병 장로가 필라델피아 검찰당국에 가해자들에

한 한 처분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사회에 커다란 반향

을 일으켰다. 딜워스 필라델피아 시장이 주도하는 오인호 추모장학 도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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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녹취록

강원룡( 크리스찬 아카데미 원장, 목사)

강한모( 뉴욕한인회장)

고 림( 주미 사 공사)

김배세( 롱아일랜드 도서 사서)

김용식( 외무장 , 주미 사, 유엔 사)

김일평(커네티컷 명 교수)

김주진( 필라델피아한인회장)

김자경(성악가)

김재 (변호사)

김정원( 뉴욕한인회장, 변호사)

김형린( 뉴욕한인회장)

남병학( 뉴욕한인회장)

노용면( 재미한인의학 회장)

박 규( 국회의장, 미국의 소리 방송 근무)

백선기( 뉴욕한인유학생회장)

유창순( 국무총리,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

윤종선(뉴욕 최 의 치과의사)

Page 36: 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 (1945-1959)koreanamericandatabank.org/images/PDF/History article by Cho.pdf ·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中央史論 36집

- 570 -

이동원( 외무장 , 뉴욕한인유학생회장)

이범선( 뉴욕한인회장, 롱아일랜드 교수)

이원순( 뉴욕한인회장)

이정식(펜실베이니아 명 교수)

임길재(의사, 최 의 개업의)

임창 ( 유엔 사)

한동일(피아니스트)

학( 재미한인의학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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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 (1945-1959)

- 571 -

The Korean Community in the New York-New

Jersey Area during the Post-War Period

James Cho

The literature on Korean Americans shows that many historians in

Korea have studied Korean immigrants in the New York area during

the colonial period. It also shows that there are enough sociological

studies of the Korean community in New York in the post-1965 period.

But there is a paucity of the literature that covers the intermediary

period between 1948 and 1965. Since the Korean-American Association

of Greater New York was established in 1960, it has made minor efforts

to collect data on the Korean community.

The author immigrated to New York in the early 1970s and became

keenly aware of the lack of data on Korean immigration history in the

New York area. In order to collect and preserve data on Korean

Americans, I looked for books from Korea focusing on Korean

immigration history in the United States, checked U.S. libraries for data

on Korean Americans, and conducted many tape-recorded personal

interviews with Korean community leaders at old ages for oral history.

This study examines the Korean community in the New York-New

Jersey area during the period of 1948 and 1959 based on data the author

has collected thus far. Specifically, it covers Koreans’ immi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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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史論 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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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terns and growth of the Korean population, settlement patterns,

business patterns and ethnic organizations during the intermediary

period.

Key Words : Korean immigration, Korean American Community

in New York-New Jersey area, Korean American

Society in America, post war period, 1950s.